<2015 Music & Electronics>
소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김경화
예술가들은 삶의 경험이나 문화적 경험,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내적, 철학적 통찰을 예술 작품에 녹여낸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들 역시 변화하는 테크놀로지와 새로워진 문화에 반응하여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그들에게 직면한 세계를 성찰한다. 2015년 10월 31일 저녁 7시 30분 올림푸스 홀에서 열린 “Music & Electronics: 소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전자적 미디어를 통해 확장된 소리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적 삶에 마주한 현대 작곡가들의 이야기들을 음악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연주회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대음악 연주 단체인 TIMF 앙상블과 한양대학교 전자음악 연구소 크리마(CREAMA, Center for Research in Electro-Acoustic Music & Audio)가 공동 주최하였다. 크리마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여 다양한 사운드의 영역을 개발하는 일에 앞장선 국내의 대표적인 전자음악 연구소로서 최근에는 국외로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타 분야와의 협력을 통해 융복합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크리마의 기획 공연들은 전자 음향 작곡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창작품이나 연주 단체들을 국내의 현대음악 청중들에게 소개하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여 청중들에게 보다 흥미롭게 새로운 음향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와 관심을 갖게 한다.
이 날의 공연에는 국내외 전자음악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여섯 명의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구성되었으며, 각 무대는 다양한 연주 매체들과 전자 음향이 결합되어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펼쳐졌다. 1부에서는 프랑스 작곡가 피에르 조드로프스키(Pierre Jodlowski, 1971-)의 “Time and Money for Percussionist and Video, Electronics”(2003)와 핀란드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Kaija Saariaho, 1952-)의 “Lonh for Soprano and Electronics”(1996), 그리고 한국 작곡가 정승재(1970-)의 “Sonic Shadow for Violin Solo and Electronics”(2015)가 연주되었다. 2부에서는 이탈리아 작곡가 파우스토 로미텔리(Fausto Romitelli, 1963-2004)의 “AMOK KOMA for 9 players and Electronics”(2001)와 헝가리 작곡가 라즐로 두브로바이(Laszlo Dubrovay, 1943-)의 “Harmonics for Piano and Amplify”(1977), 그리고 한국 작곡가 최지연(1969-)의 “Métaphore Ⅴ for 2 Percussionists and Electronics”(2015)가 연주되었다.
첫 번째 작품은 조드로프스키의 “Time and Money for Percussionist and Video, Electronics”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단순한 모양의 반복되는 패턴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이 전자 음향과 어우러져 펼쳐졌다. 어떤 형태의 단편인 듯, 미니멀리즘적인 반복인 듯 궁금증을 자아냈다. 잠시 후 화면의 이미지가 줌 아웃되면서 그 형태는 명확해졌다. 동전이었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시간과 돈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동전의 이미지는 주제의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었다. 타악기와 비디오, 전자 음향을 활용하여 무대 위에서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이미지와 타악기 연주자의 드라마틱한 제스쳐,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듯한 음향 효과가 결합됨으로써 입체적 공간성을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거 영화나 라디오에서 나왔던 대화 소리들의 단편이 음향적 재료로 사용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현실 공간을 넘어 가상의 공간을 경험하도록 하였다. 작곡가는 이러한 소리재료들이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 차원, 특히 과거의 공통된 기억과 더 나아가 개인적인 기억의 차원까지 영향을 미쳐 소리의 경험의 폭을 확장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시간이 곧 경쟁력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돈을 얻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이 주는 의미를 다시금 새겨볼 수 있도록 초대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두 번째 작품인 사리아호의 “Lonh for Soprano and Electronics”은 소프라노와 전자음향을 위한 작품이다. 제목의 ‘Lonh’은 ‘멀리 있는’이라는 의미로 중세 트루바두르였던 조프레 루델(Jaufré Rudel)의 시 제목이며 시의 내용을 꼴라주하여 이 곡의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소프라노의 노래 선율뿐 아니라 낭송과 속삭임, 녹음된 목소리나 타악기 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등의 자연의 소리를 모방한 전자적 사운드 등 여러 가지 소리 재료들이 다양한 음향 변형 프로세싱을 통해 조합되면서 독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러한 음향 효과는 외적인 공간을 가로질러 내적, 심리적 공간까지 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초월적인 아우라를 형성하였다. 세 번째 작품으로 정승재의 “Sonic Shadow for Violin Solo and Electronics”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바이올린의 소리에 전자적인 접근법을 가하여 그림자의 여운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부터 왔다. 사물에 빛을 가하면 그림자가 생기고, 빛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그림자의 모양이 변형되고 왜곡되듯, 소리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곡가의 발상은 전자적인 방법으로 소리의 그림자(sonic shadow)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곡은 바이올린 소리에 그로부터 형성된 전자 음향이 마치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붙는 흥미로운 음향을 만들어내었다.
잠깐의 휴식 후에 2부의 세 곡들이 무대에 올랐다. 2부 첫 번째 작품으로 로미텔리의 “AMOK KOMA for 9 players and Electronics”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9명의 앙상블과 전자 음향을 위한 음악으로 TIMP 앙상블과 크리마가 연주를 맡았다. 작품의 제목인 ‘AMOK’와 KOMA’는 대칭적인 형태의 회문(palindrome)으로, 앞으로 읽으면 ‘AMOK’, 우리말로는 ‘미친 듯이 날뛰다’이며 뒤로 읽으면 ‘KOMA’, 우리말로는 ‘혼수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유희에는 흥미롭게도 서로 관통하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이 곡의 주요 주제로 작용하였다. 이 작품은 사이키델릭 록의 선율 일부를 차용하여 다양한 변형 과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도입부에 등장하는 세 개의 코드는 곡 전체에 걸쳐 반복되면서 일관성 있는 음향을 구축해 나갔다.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록 음악에서 차용된 선율이 중첩되거나 리듬이 세분화되고, 강렬한 비트로 변화하면서 이 곡의 제목처럼 점점 코마 상태로 치닫듯이 몰아쳐 강렬하고 자극적인 사운드를 형성해갔다. 클라이맥스 이후 도입부에 등장하였던 세 개의 코드가 다시 나타나면서 음향들은 점차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뒤 이어 두브로바이의 작품 “Harmonics for Piano and Amplify”가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사운드 증폭을 통해 피아노의 배음에 주목할 수 있도록 작곡되었다. 피아노에서 한 손으로는 소리 나지 않게 건반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리가 나도록 건반을 누르면서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배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음부터 시작하여 점차 화음 단위로 음을 추가하면서 음량과 음향이 증폭되고 두터워지는 과정을 통해 음향적 효과 역시 경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최지연의 작품 “Métaphore Ⅴ for 2 Percussionists and Electronics”가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두 명의 타악기 연주자와 전자 음향을 위한 곡으로, 두 타악기 연주자가 마치 연사가 되어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풀어가듯이 음악을 펼쳐갔다. 어떠한 정해진 논리나 구조에 의존하지 않고 이야기를 서술하듯 자유롭게 표현하는 형식을 택하였다는 작곡가의 설명처럼 이 작품은 사운드 자체와 그 표현 기법이 이야기 서술에 대한 메타포가 되어 소리 재료들이 펼쳐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감상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청각적 경험들을 토대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날 공연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먼저 전자 음악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진 다채롭고 확장된 소리의 영역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인성을 비롯하여 타악기, 바이올린, 피아노, 기악 앙상블 등의 다양한 연주 매체들이 전자 음향과 만났을 때 얼마나 새롭고 입체적인 음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전자적으로 확장된 소리가 창작의 재료로 사용되었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주제와 아이디어의 영역이 얼마나 폭넓은지, 현실적 차원을 넘어서 과거의 기억과 내적, 심리적 영역, 상상력의 세계와 가상적 세계까지도 얼마나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다차원적인 음악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지 보여주었다.
TIMF 앙상블과 크리마가 공동으로 개최한 이번 음악회는 소리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테크놀로지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 소리 재료의 활용과 그로부터 경험 가능한 다양한 음향적 세계까지 시각적, 청각적 효과와 더불어 창의적인 방식으로 다채로운 음악적 상상력을 펼쳐 보여주었던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